덕정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홈페이지

  지금도 팔리고 있는 한국 최초의 소화제 ‘활명수’를 만드는 동화약품에서 코로나 기간 동안 여행 관련 광고 캠페인을 펼쳤다. 세계 곳곳의 여행지 사진을 크게 싣고 여행 격언을 적어 놓았는데, 여행은 물론 외출도 조심스럽던 시절, 신문을 보다 이 광고가 나오면 한참을 쳐다보고는 했다. 

격언 중에는 ‘여행과 장소의 변화는 정신에 활력을 준다’는 세네카의 말도 있었고, ‘여러 곳을 여행한 자만이 지혜롭다’는 아이슬란드 속담이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칸트같은 천재는 죽을 때까지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고 정주(定住)했다. 그는 여행을 하지 않았지만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뤄낸 위대한 지성이다. 나는 종종 여행의 의미를 생각할 때 칸트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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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는 줄거리가 복잡하고 구성도 치밀한데 극장 문을 나설 때 건질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떤 영화는 그 반대다. “여덟 개의 산”이 바로 그런 영화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고즈넉한 고산(高山)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단순한 줄거리와 구성을 가졌지만 사색의 보고(寶庫)다. 친구, 우정, 아버지, 집, 언어, 산, 인간, 질투 그리고 여행 등등,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  진폭은 알프스의 봉우리처럼 높고, 계곡처럼 깊다.

  주인공 브루노는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랐다. 또 한 명의 주인공 피에트로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여름을 보내러 산골 마을에 왔다가 브루노를 만난다. 브루노의 아버지는 떠돌이 벽돌공이고,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엔지니어. 

극과 극은 통한다고, 11살 동갑내기 소년들은 친구가 된다. 20년 우정의 시작이었다.

자주 보지 못한 채 머리가 굵어지면 서먹해지기 마련, 한동안 소식이 끊긴 뒤 읍내 카페에서 잠깐 조우했지만 서로 어색한 눈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던 두 청소년은 피에트로 아버지의 장례를 계기로 청년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여덟 개의 산"의 주인공 브루노(왼쪽)와 피에트로 / 영화사 진진이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산 사나이가 된 브루노는 세상을 떠난 피에트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레논산 중턱에 돌집을 짓겠다며 피에트로에게 도와 달라고 한다. 함께 집을 지으며 다시 우정을 쌓아가는 두 청년. 

하지만 소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며 산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칭 ‘일부는 사람, 일부는 동물, 일부는 나무’인 브루노와, 작가를 꿈꾸며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피에트로는 서로 다른 인생행로와 가치관 속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각자의 인생길을 걸어 나간다.